역사 요약
천 년 전, 소수의 폴리네시아인들이 새로운 땅을 찾아 세계에서 가장 큰 바다를 노 저어 건넜습니다. 여러 세대에 걸쳐 그들의 조상은 오직 별에 의지해 광활한 태평양을 동쪽으로 넓혀 나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땅을 찾아냈습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이 작은 섬에 정착한 이들은 새 보금자리를 ‘세상의 배꼽’이라는 뜻의 테 피토 오 테 헤누아라고 불렀습니다. 이보다 더 외딴 곳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어울리는 이름이었고... 그 생각은 옳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훗날 라파누이로 알려지게 될 이 섬의 주민들은 오직 자신의 손과 돌만으로 수백 기의 거대한 돌기둥 석상을 조각하고 세우고 운반해 낸 예술의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롱고롱고(roŋo-roŋo)라는 그림 문자도 발전시켰습니다. 모든 예상을 뒤엎고,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을 환경에서 업적과 지성, 음악과 전설이 가득한 문화가 꽃피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정체성을 제대로 배웠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라파누이 사람들은 아득한 옛날 호투 마투아 왕이 아나케나 해변에 상륙하던 때까지 자신의 혈통을 거슬러 기억하고 있습니다.
태평양으로의 확장
기원전 1500~2000년
동남아시아의 이주민들이 태평양을 향해 동쪽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극도로 고립된 데다 아주 먼 동쪽에 자리한 라파누이는 아마도 이 확장 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사람이 정착한 섬이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동남아시아에서는 4000년 전 태평양으로의 확장이 시작되기 이전 시대의 언어적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정착

서기 1000년 무렵

정착민들이 이스터섬에 도착했습니다(이스터섬의 첫 정착민에 대해 더 읽어 보세요). 그들이 발견한 섬은 야자나무와 여러 고유 식물이 온 섬을 뒤덮은 울창한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새 보금자리에 테 피토 오 테 헤누아(세상의 배꼽), 마타 키 테 랑기(하늘을 바라보는 눈)처럼 이토록 외딴 섬에 어울리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얼마 후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두 번째 이주민 집단이 섬에 도착했습니다. 새로 온 주민들은 키가 작고 몸이 다부진,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귓불을 늘여 어깨까지 늘어뜨리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 전통은 나중에 첫 번째 정착민 집단도 따르게 되었습니다. 두 종족을 구별하기 위해 각각 이름이 붙었습니다. 첫 번째 집단은 하나우 모모코라고 불렸는데, 모모코는 도마뱀을 뜻하는 모코를 겹쳐 쓴 말로 이 사람들이 키가 크고 날씬했음을 가리킵니다. 두 번째 집단은 하나우 에에페라고 불렸습니다(에에페는 넓다, 또는 몸집이 크다는 뜻입니다).
어느 시점에 하나우 모모코가 단 한 명을 제외한 하나우 에에페를 모두 몰살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라파누이 사람들은 주로 하나우 모모코의 후손입니다.
문명의 성장

1200년 무렵
테 피토 오 테 헤누아의 초기 주민들은 섬의 자연을 익혀 농사를 잘 지었습니다. 수확이 넉넉했기에 식량을 생산하지 않는 일에도 노동을 쏟을 수 있었고, 그리하여 왕과 중요한 인물을 묻는 아후라는 커다란 직사각형 돌 제단을 쌓는 전통이 생겨났습니다.
거석을 세우다

1400~1650년 무렵
아마도 15세기나 16세기 무렵, 이 작고 외딴 땅의 문명은 고도로 발달해 있었습니다. 수확이 충분히 넉넉해서 인구의 일부가 점점 더 큰 석상을 만드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이 거석상은 다른 부족들이 사들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리기 위해 무덤 제단(아후) 위에 세웠습니다. 그들은 이 석상을 모아이라고 불렀는데, ‘존재하다’라는 뜻입니다.
삼림 파괴
1650년 무렵
섬 주민은 세대를 거듭하며 늘어났습니다. 울창하던 야자나무 숲의 상당 부분이 농경지를 마련하기 위해 베어지고 불태워졌습니다. 모아이를 만들던 시대에는 석상을 운반하는 데 많은 목재가 필요했습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새로 자라는 것보다 더 많은 나무가 베어졌고, 목재는 점점 귀해졌습니다. 그 결과 거의 모든 석상이 조각된 화산 채석장 라노 라라쿠에는 운반을 기다리는 완성된 석상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17세기에 큰 나무 자원이 바닥나자 조각가들은 작업을 멈추었습니다.
새로운 기후에 적응하다
널리 퍼진 믿음과 달리, 나무가 사라졌다고 해서 라파누이 문화가 소멸한 것은 아닙니다. 섬 주민들은 나무 없는 섬에 잘 적응했습니다. 나무가 없어지자 바람이 땅을 메마르게 했지만, 주민들은 여러 기법으로 흙의 습기를 지켰습니다. 그중 하나가 마나바이로, 둘러싼 흙이 마르지 않도록 보호하는 돌담 고리입니다. 눈에 덜 띄는 키키리(kīkiri)도 쓰였는데, 땅을 돌로 덮어 그 아래의 흙을 촉촉하게 유지하는 방식입니다. 빗물은 돌에서 광물질을 씻어 흙 속으로 실어 나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기법을 쓴 흔적은 라파누이 곳곳에 아주 많이 남아 있습니다.
탕가타 마누 - 오롱고의 조인 경쟁

1700~1866년 무렵
모아이 조각 시대가 끝난 18세기 초부터, 사람들은 라노 카우 화산의 절벽 위에 자리한 오롱고 마을에서 열리는 탕가타 마누, 곧 조인
경쟁에 어느 정도 힘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마누타라(검은등제비갈매기)의 산란기가 시작되면 각 부족의 대표 한 명이 작은 섬 모투 누이까지 헤엄쳐 갔습니다. 가장 먼저 알을 손에 넣은 사람이 다시 헤엄쳐 돌아와 자기 족장에게 탕가타 마누의 칭호를 안겼고, 이는 두 사람은 물론 부족 전체에 큰 특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유럽인과의 접촉

1722
처음으로 잘 기록된 유럽인과의 접촉은 1722년 네덜란드 제독 야코프 로헤베인과 함께 이루어졌습니다(다만 이스터섬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그가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부활절에 도착했고, 그에 따라 섬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상륙하자마자 그들은 너무 가까이 다가왔다는 이유로 12명을 죽이고 더 많은 사람을 다치게 했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이 보여 준 그토록 발달한 기술을 목격한 일은 섬 주민들에게 분명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야코프 로헤베인과 그의 선원들은 땅에 쓰러진 석상을 보았다고 기록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본 석상은 모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의 기록에 따르면 섬 주민들은 체격이 좋고 힘이 셌으며, 견과류를 깨뜨릴 수 있을 만큼 튼튼하고 아주 하얀 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터섬이 바깥 세계에 알려지면서 유럽인의 방문은 특히 19세기에 들어 점차 늘어났습니다.
노예 사냥
1862 - 1863
섬을 찾은 유럽인들은 대체로 섬 주민이 수천 명에 이른다고 추산했습니다. 그러다 1860년대 초, 섬 주민 1500명이 노예로 끌려갔는데, 이는 일할 수 있는 남자 대부분에 해당하는 숫자였습니다. 끌려간 이들 가운데에는 당시 통치하던 왕과 롱고롱고 문자를 읽을 줄 알던 현자들도 있었고, 오늘날 이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노예들은 친차 제도의 구아노 퇴적지와 페루의 농장에서 일했습니다. 그중 몇 명은 나중에 풀려났지만,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귀향길에 천연두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살아남은 두 사람이 이 병을 나머지 라파누이 주민들에게 퍼뜨렸습니다. 원주민들에게는 이 외래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고, 그 결과 인구가 급격히 줄었습니다. 몇 년 뒤 섬에 남은 사람은 고작 111명이었습니다.
옛 문화를 버리다
1866
가톨릭 선교사 외젠 에로는 라파누이에서 일어난 불행한 일들을 전해 듣고 1864년 이 섬을 찾아 9개월 동안 머물렀습니다. 2년 뒤 그는 가톨릭 선교회를 세웠습니다.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에게 조인 경쟁 같은 옛 관습을 버리라고 했고, 원주민들은 그 말을 따랐습니다. 선교사들은 원주민 모두를 기독교로 개종시켰습니다. 이후 이스터섬에서 노예 무역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칠레 병합

1888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라파누이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식민 국가는 없었습니다. 영국은 프랑스가 먼저 차지하지 못하도록 칠레에 이 섬의 영유권을 주장하라고 권했습니다. 1888년 칠레 해군 대령 폴리카르포 토로는 당시 라파누이의 왕 아타무 테케나(사실 정통 왕족 혈통이 아니라 진짜 왕이 통치를 맡긴 인물에 불과했습니다)에게 섬에 대한 완전하고 전적인 주권
을 칠레에 넘긴다는 문서에 서명하게 했습니다. 반면 라파누이어 번역문에는 우정
과 보호
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럼에도 1888년은 라파누이가 공식적으로 칠레 영토가 된 해입니다.
이 조약에는 상징적인 의식도 담겨 있었습니다. 아타무 테케나는 한 손에는 풀을, 다른 손에는 흙을 쥐었습니다. 그는 폴리카르포 토로에게 풀을 건네고 흙은 자신이 가졌는데, 이는 라파누이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자기 땅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라파누이 사람들은 지금도 이따금 칠레 사람들을 풀
이라는 뜻의 마우쿠라고 부릅니다.
윌리엄슨 밸푸어 사(Williamson Balfour & Co.)
1903 - 1953
칠레는 1903년까지 라파누이를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해 영국·칠레 기업 윌리엄슨 밸푸어 사(Williamson Balfour & Co.)가 이스터섬 개발회사(Easter Island Exploitation Company)를 세우고, 섬을 양 목장으로 50년간 임차하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원주민들은 양 도둑질을 막기 위해 오늘날 항가로아 마을에 해당하는 지역에 경비가 지키는 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 갇혀 지냈습니다. 최대 7만 마리의 양이 섬을 자유롭게 돌아다녔습니다. 1936년 이후 사정이 나아졌습니다. 서면으로 허가를 신청해 받으면 원주민도 시골 지역을 찾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각 가정은 이따금 양을 한 마리씩 받기도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합성 양모가 발명되면서 이스터섬 개발회사의 시장 사정은 어려워졌습니다. 여기에 끊임없는 원주민 봉기까지 겹치자 회사는 계약을 갱신하지 않고 1953년 섬을 떠났습니다.
오늘날의 라파누이

오늘날 라파누이 사람들은 약 3000명이지만,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 가운데 부모가 모두 라파누이 사람인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원주민 언어는 널리 쓰이지 않으며 주로 원로들 사이에서 쓰입니다.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라파누이어로 간단한 대화만 나눌 수 있는 경우가 많고, 금세 스페인어로 바꿔 말하곤 합니다. 오래된 라파누이어에 대한 깊은 지식은 오늘날 소수만의 전유물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칠레는 라파누이 문화를 잘 보살피고 있으며, 정부는 섬 주민들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힘닿는 대로 돕고 있습니다. CONADI(칠레 국가원주민개발공사)라는 기관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든 문화 보존에 이바지하려는 섬 주민들의 잘 짜인 프로젝트에 비용을 지원합니다. 세상이 작은 섬 라파누이에 안겨 준 불행한 사건들에 대한 일종의 화해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이스터섬 사회에 대해 더 읽어 보세요.
롱고롱고 - 잃어버린 라파누이의 문자

롱고롱고(라파누이어로 roŋo-roŋo)는 이스터섬의 고대 그림 문자입니다. 폴리네시아 전체에서 유일하게 알려진 토착 문자입니다. 롱고롱고는 이집트 상형문자처럼 사물을 본뜬 기호를 사용합니다.
롱고롱고 기호는 나무 목판에 새겨졌습니다. 오늘날 현존하는 것으로 알려진 롱고롱고 목판은 25점 정도이며, 모두 이스터섬 밖의 박물관들에 흩어져 있습니다.
잃어버린 지식
1862~1863년, 수많은 노예 사냥꾼들이 라파누이를 습격했습니다. 일할 수 있는 남자는 모두 끌려갔고, 그중에는 롱고롱고를 읽고 쓸 줄 알던 현자들도 모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뒤로 목판을 해독할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 언어학자가 시도했지만, 기호를 읽는 방법에 대해 널리 받아들여진 이론은 아직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