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2년 야코프 로헤베인 항해의 항해일지

목차
  1. 야코프 로헤베인 씨의 공식 항해일지
  2. 카를 프리드리히 베렌스 특무상사의 보고

야코프 로헤베인은 1722년 라파누이에 처음 발을 디딘 유럽인입니다.

야코프 로헤베인 씨의 공식 항해일지

볼턴 글랜빌 코니 필사·번역·편집. 1908년 출간.

카를 프리드리히 베렌스(CARL FRIEDERICH BEHRENS)의 독일어 원문에서 번역: Der wohlversiichte Süd-Länder y das ist: ausführliche Reise-Beschreibung um die Welt.

원본 파일(.pdf): The voyage of Captain Don Felipe González to Easter Island 1770-1 93~115쪽

5일. 추측 항법에 따른 위도는 남위 27도 4분, 경도는 266도 31분, 침로는 서 ½ 남, 항주 거리 7마일, 바람은 북북서에서 남서로, 미풍이 일정치 않고 무풍이 섞였으며, 날씨가 흐리고 소나기가 내렸다. 거북 한 마리와 떠다니는 해초, 새들을 보았다. 오후 당직 열 번째 모래시계 무렵, 우리 앞에서 항해하던 아프리칸 갤리호가 육지가 보인다는 신호를 올리며 우리를 기다리려고 정선하였다. 바람이 약해 모래시계 네 개가 다 떨어진 뒤에야 따라잡은 우리는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모두가 우현 쪽, 북서쪽으로 약 5 ½마일 떨어진 곳에 낮고 평평한 섬이 있는 것을 아주 똑똑히 보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에 첫 당직이 끝날 때까지 돛을 줄이고 천천히 나아가다가 정선하여 새벽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였다. 이렇게 결정되자 뒤따르던 바우만 선장에게 필요한 사항을 알렸다. 그리고 이 땅에는 부활절에 발견하였으므로 Paásch Eyland(부활절 섬)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였고, 모두 이 낮은 땅이 미지의 남방 대륙 해안선을 알리는 전조이기를 바랐다.

6일. 남동풍과 동남동풍이 약하게 불었고, Padsch Eyland는 우리로부터 서미북(西微北) 8~9마일 거리에 있었다. 바람이 불어 가는 쪽 해안의 위험을 피하려고, 섬의 바람그늘로 들어가고자 서미남과 북서 사이로 침로를 잡았다. 정오에 보정한 침로는 서, 항주 거리 10마일, 추측 위도는 남위 27도 4분, 경도는 265도 42분이었다. 오후 아홉 번째 모래시계 때 여러 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섬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리하여 내륙의 사정을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 상륙 원정을 해야 하지 않을지 다른 배의 선장들과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아렌트호와 틴호번호의 소형선 두 척에 인원과 무기를 넉넉히 실어 해안으로 보내, 보트에서 상륙대를 내리기 알맞은 장소를 찾고 수심도 재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결정한 뒤 우리는 밤새 배를 몰아 해안 쪽으로 다가갔다 물러났다 하며 머물렀다. 그 결의는 다음과 같다.

동행하는 세 척의 지휘관 회의. 아렌트호 선상에서 아래 서명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림.

1722년 4월 6일 월요일.

의장은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우리는 이제 모래섬에서 약 2마일 거리까지 다다랐는데, 이 섬은 이번 원정의 목적 가운데 하나인 (아직 보이지 않는) 해안 지대에서 동쪽 방향에 놓여 있다. 또한 여러 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으니, 앞서 말한 섬이 모래투성이에 척박한 것으로 드러날지라도 사람이 살고 있다고 결론짓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므로 의장은 부주의하고 소홀하게 나아가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라고 보며, 오늘 밤에는 배들을 해안 쪽으로 다가갔다 물러났다 하며 머물게 하고, 날이 밝으면 인원을 넉넉히 태우고 제대로 무장한 소형선 두 척을 (적대적인 만남이 있을 경우 방어 태세를 갖출 수 있도록) 육지 가까이 보낼 것을 제안한다. 아울러 주민들에게 온갖 우의를 보이며, 그들이 장신구나 그 밖의 용도로 무엇을 몸에 걸치거나 사용하는지 살피고 알아보며, 채소나 과일, 짐승 같은 신선한 식량을 물물교환으로 얻을 수 있는지도 알아보아야 한다. 이 제안을 논의한 끝에 만장일치로 승인하고 채택하였다. 나아가 아렌트호와 틴호번호의 소형선 두 척은 동틀 무렵 출발하고, 아프리칸 갤리호는 가능하고 신중한 범위에서 육지에 최대한 가까이 따라가며 (필요한 경우) 앞서 말한 소형선들을 엄호하고 방어하기로 결정하였다. 위의 배에서 위에 적은 날에 결의하고 증명함. (서명) 야코프 로헤베인, 얀 코스터르, 코르넬리스 바우만, 룰로프 로젠달.

7일. 날씨가 매우 변덕스러워 천둥과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내렸다. 바람은 북서쪽에서 일정치 않게 불었고 이따금 무풍이 되어, 상륙 원정을 성공적으로 해낼 가망이 없었다. 오전에 바우만 선장이 이스터섬 사람 하나를 그가 타고 온 배와 함께 우리 배로 데려왔다. 그는 육지에서 배를 타고 우리 배 가까이까지 나와 있었는데, 완전히 벌거벗은 채 수치심이 드러내기를 꺼리는 부분조차 조금도 가리지 않았다. 이 가엾은 사람은 우리를 보고 매우 기뻐하는 듯했고, 우리 배의 구조에 더할 나위 없이 놀라워하였다. 그는 팽팽하게 세운 원재(圓材), 튼튼한 삭구와 동삭, 돛, 대포 — 대포는 아주 꼼꼼하게 온 데를 더듬어 보았다 — 를 비롯해 눈에 띄는 모든 것을 유심히 살폈다. 특히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을 때는 화들짝 뒤로 물러섰다가, 그 환영의 정체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여겼는지 거울 뒤쪽을 들여다보았다.

우리가 그를 보며 충분히 즐겼고 그도 우리를 보며 충분히 즐긴 뒤, 그의 목에 푸른 구슬1 두 줄을 걸어 주고 작은 거울과 가위 한 자루, 그 밖에 그가 특히 마음에 들어 하는 듯한 비슷한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선물하고는 그를 다시 카누에 태워 해안으로 돌려보냈다.

1) 원문에는 구슬을 뜻하는 coraelen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육지에서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가자, 모래가 많고 낮은 섬에 관한 기록(데이비스 선장과 기록자 라이어널 웨이퍼의 진술과 증언에 따라 윌리엄 댐피어 선장이 그렇게 묘사한 것으로, 앞서 말한 댐피어는 이 발견과 다른 발견들을 담은 웨이퍼의 기록을 출판해 세상에 알렸으며, 자신의 모든 여행과 항해를 담은 책에 이를 주요 내용으로 실었다)이 우리가 발견한 것과는 조금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또한 앞서 말한 발견자들이 그 너머 14~16마일 거리에 보이며 시야 밖으로 길게 뻗어 있다고 한 땅, 곧 앞서 말한 댐피어가 미지의 남방 대륙의 끝자락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한 높은 땅의 줄기도 이것일 수 없었다. 이 이스터섬이 모래섬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모래섬은 작고 낮은 반면, 이스터섬은 둘레가 15~16마일에 이르고, 서로 약 5마일 떨어진 동쪽 끝과 서쪽 끝에 완만하게 경사진 높은 언덕이 둘 있으며, 그 기슭에는 평지 위로 솟은 작은 언덕이 서너 개 더 있어, 이 땅은 적당한 높이로 바다의 힘이 미치지 않을 만큼 솟아 있기 때문이다.

처음 더 먼 곳에서 바라보았을 때 우리가 이 이스터섬을 모래땅으로 여겼던 까닭은, 바싹 마른 풀과 건초, 혹은 그 밖에 그을리고 타 버린 덤불을 그처럼 메마른 성질의 흙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겉모습으로는 유난히 성기고 빈약한 초목 말고는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었으니, 발견자들이 이 섬을 모래섬이라 일컬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앞서의 설명에 비추어 보건대, 이번에 발견한 이 이스터섬은 우리 원정의 목적지 가운데 하나인 그 땅보다 더 동쪽에 있는 다른 땅으로 판명될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발견자들은 말로나 글로나 보고 속에 거짓말을 한 보따리나 늘어놓은 셈이 된다.

1) 약 6펄롱.

8일. 바람은 남, 남미동, 남남서로, 중간 돛을 줄여야 할 만큼 불었고 일정치 않았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우리 소형선과 틴호번호의 소형선에 인원과 무기를 넉넉히 실었다. 이제 육지 가까이 다가간 그들은 명령을 받고 나서, 그곳 주민들이 온갖 색깔의 천으로 아주 멋지게 차려입고 있으며 우리더러 뭍으로 오라는 손짓을 여러 번 했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인디언들이 많이 모여 있으면 상륙하지 말라는 것이 우리의 명령이었으므로 허락되지 않았다. 게다가 몇몇은 원주민들이 귀에 은판을 달고 목에 진주조개 껍데기를 장신구로 걸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하였다. 해 질 무렵, 우리를 맞을 준비를 하고 이미 정박해 있던 틴호번호와 아프리칸 갤리호 사이의 정박지에 들어선 우리는 해변에서 4분의 1마일1 떨어진, 바닥이 산호로 된 수심 22패덤 지점에 닻을 내렸다. 섬의 동쪽 끝은 우리로부터 동미남, 서쪽 끝은 서북서 방향에 있었다.

1) 편집된 일지에는 여기에 이 세대의 후손들도 그 아버지들 못지않게 손버릇이 나빴다는 취지의 각주가 달려 있으며, 이와 관련해 쿡, 라페루즈, 코체부가 각자 겪은 일을 적은 기록을 참조하고 있다.

9일. 아주 많은 카누가 배로 다가왔다. 이 사람들은 그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대단한 탐욕을 드러냈고, 어찌나 대담한지 선원들의 머리에서 모자를 벗겨 들고는 전리품을 챙겨 바다로 뛰어들었다1. 해안에서 배까지 헤엄쳐 오는 이들이 무척 많은 것으로 보아 그들은 대단히 뛰어난 헤엄꾼인 듯하다. 또 어떤 이스터섬 사람은 카누에서 아프리칸 갤리호의 선실 창문으로 기어 들어와, 탁자에 덮여 있던 천을 보고는 좋은 전리품이라 여겼는지 그 자리에서 들고 달아났다. 그러니 모든 것을 각별히 단단히 지켜보아야 한다. 아울러 우리 임무에 관해 보고하기 위한 조사를 하려고 134명으로 이루어진 상륙대를 꾸렸다.

1) Ubasworteln은 만들어 낸 혼성어로, 참마를 뜻하는 말레이어 ubi와 뿌리를 뜻하는 네덜란드어 wortel을 합친 말이다.

2) 로헤베인이 쓴 말은 duymen이다. 글자 그대로는 엄지, 또는 엄지 너비를 뜻하지만, 인치를 가리킬 때 흔히 쓰는 네덜란드어 표현이며, 11인치가 1피트에 해당한다.

3) 베렌스의 기록은 부록 I을 보라. 그는 그들의 귀는 어깨까지 늘어질 만큼 길었다. 몇몇은 특별한 장식으로 귓불에 흰 장신구를 달고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4) 이 풍습은 쿡과 포스터도 언급하였다. 바로 앞의 각주를 보라.

1) 문신을 했다는 뜻임이 틀림없다.

10일. 아침에 우리는 보트 세 척과 소형선 두 척에 134명을 태우고 출발하였다. 모두 머스킷총과 권총, 커틀러스로 무장하였다. 해안에 이르자 보트와 소형선들은 닻을 내리기 위해 서로 바짝 붙어 있었고, 이를 지키도록 위와 같이 무장한 20명을 남겨 두었다. 아프리칸 갤리호의 보트에는 이물에 캐로네이드포 두 문을 더 실었다. 이 모든 준비를 마친 뒤 우리는 간격을 벌리되 대오를 잘 유지하며 나아갔고, 바닷가에 아주 많은 바위를 기어올라 평탄한 땅까지 갔다. 그동안 엄청나게 많이 몰려든 원주민들에게 길을 비키고 자리를 내 달라고 손짓하였다. 거기까지 가서 세 척의 배에 탄 모든 선원으로 본대를 편성하였고, 사령관과 코스터르, 바우만, 로젠달 선장이 각자 자기 선원들의 선두에 섰다. 다른 이들의 뒤쪽에 자리한 이 3열 종대는 니콜라스 토나르 중위가 지휘하는 병사 절반이 우익을 이루어 엄호하였고, 나머지 병사 절반으로 이루어진 좌익은 마르티뉘스 케이런스 소위가 이끌었다. 이렇게 병력을 배치한 뒤, 뒤처진 우리 사람들이 대열에 합류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려고 조금 앞으로 나아갔다가, 맨 뒤의 사람들이 따라오도록 멈춰 섰다. 그때 전혀 뜻밖에도, 그리고 우리로서는 크게 놀랍게도, 뒤쪽에서 총성 네다섯 발과 함께 't is tyd, 't is tyd, geeft vuur! [때가 됐다, 때가 됐다, 쏴라!]라는 고함이 크게 들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서른 발이 넘는 총성이 울렸고, 깜짝 놀라 겁에 질린 인디언들은 부상자 말고도 죽은 자 10~12명을 남겨 둔 채 달아났다.

1) 섬을 두루 돌아다니며 석상을 여럿 살펴본 신사들 가운데 몇몇은, 석상을 만든 돌이 섬에서 본 다른 어떤 돌과도 다르며 인공적으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는 의견이었다. 쿡, 참고문헌 16번.

이 사람들은 팔다리가 균형 잡혀 있고 근육이 크고 단단하다. 체격이 크며, 타고난 피부색은 검은색이 아니라 옅은 노란색 또는 누르스름한 색인데, 많은 젊은이에게서 그것을 볼 수 있었다. 몸에 짙은 푸른색을 칠하지1 않았거나, 신분이 높아 들에서 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람들은 또한 눈처럼 흰 이를 가졌으며, 늙고 머리가 센 이들조차 이가 유난히 튼튼하다. 우리 복숭아씨보다 껍데기가 두껍고 단단한 크고 딱딱한 견과를 깨뜨리는 것을 보고 이를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은 머리카락과 수염이 짧았지만, 어떤 이들은 길게 길러 등 뒤로 늘어뜨리거나, 바타비아의 중국인들처럼 땋아서 정수리에 감아 올렸는데, 그곳에서는 이를 condt라고 부른다.

2) 로헤베인이 석상을 묘사한 것을 보면, 그는 석상에 가까이 다가가 본 적이 없고 수백 야드 떨어진 곳에서만 본 것으로 보인다. 그가 말한 ‘바구니’는 대부분의 석상 위에 얹혀 있던 응회암으로 된 관 모양의 원통이었음이 틀림없다.

1) 출입구는 한쪽 면의 가운데에 있는데, 현관처럼 생겼고 낮고 좁아서 사람이 겨우 네 발로 기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이다. 쿡, 참고문헌 16번.

이 사람들의 예배가 어떤 것인지는 머문 기간이 짧아 충분히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이 세워 둔 유난히 키가 큰 몇몇 석상 앞에 불을 피우고, 그다음 발뒤꿈치를 깔고 쪼그려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두 손바닥을 마주 대고 번갈아 들어 올렸다 내리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1) 그들에게는 여자가 매우 적거나, 아니면 우리가 머무는 동안 많은 여자가 나타나지 못하도록 제지당한 것이다라고 쿡은 말한다. 쿡, 참고문헌 16번.

2) 내가 본 가장 큰 집은 길이가 약 60피트, 가운데 높이가 8~9피트, 양 끝 높이가 3~4피트였으며, 양 끝의 너비는 높이와 거의 같았다. 쿡, 참고문헌 16번.

이 사람들이 음식을 어떻게 익혀 먹는지 우리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들에게 토기 단지나 냄비, 그릇이 있는 것을 본 사람도, 찾아낸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2) 그것들은 아주 큰 다듬은 돌로 쌓았다기보다는 겉면을 댄 것인데, 그 솜씨는 영국에 있는 가장 훌륭한 평범한 석조물에 뒤지지 않는다. 어떤 회반죽도 쓰지 않았는데도 이음매가 매우 촘촘하고, 돌들은 아주 교묘하게 장부와 장부 구멍으로 서로 맞물려 있다. 쿡, 참고문헌 16번.

3) 원문의 단어는 stoep이다. 영어에는 같은 뜻의 표현이 없지만, ‘porch(현관)’, ‘threshold(문지방)’, ‘piazza(주랑)’가 저마다 어느 정도 그에 해당한다.

그래서 충분히 자세히 조사할 수 없었던 우리는, 그들이 땅속에 속이 빈 커다란 부싯돌을 두고 무언가를 끓일 때 거기에 물을 담는 것이 틀림없다고 결론지었다.

이 집들에는 출입구가 하나뿐인데, 어찌나 낮은지 무릎으로 기어서 드나들며, 위쪽은 둥근 천장이나 아치처럼 둥글다1. 지붕도 같은 모양이다.

1722년 4월 10일1 금요일.

의장은 이번 원정의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새로 찾은 섬에 관해 각자의 생각과 의견을 내놓게 하였다. 곧, 이번 발견에 비추어 이 회의가 이달 2일에 심의하여 채택한 결의를 그대로 지키고 이행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와 달리 서쪽으로 100마일을 더 나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번에 발견한 이 땅2(부활절에 목격하고 발견하였으므로 우리는 Padsch Eyland라 부른다)은 둘레가 네덜란드 마일로 16마일에 이르고 꽤 높은 땅3이므로 작고 낮은 모래섬이라고 할 수 없다. 아프리칸 갤리호가 육지가 보인다는 신호를 올렸을 때 이 땅은 우리로부터 8~9마일 떨어져 있었다. 이 거리는 정확하다고 보아도 무방한데, 다음 날 하루 종일 신선한 바람을 받으며 나아가서야 저녁 무렵 2마일 남짓한 거리까지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땅을 모래땅이라고 할 수도 없다. 우리가 보니 모래땅이기는커녕 오히려 대단히 비옥하여, 바나나와 감자, 놀랄 만큼 굵은 사탕수수를 비롯해 온갖 땅의 열매가 났기 때문이다. 다만 큰 나무와 가축은 닭 말고는 없었다. 이곳은 비옥한 흙과 좋은 기후로 보아, 제대로 일구고 가꾼다면 지상 낙원으로 만들 수도 있을 만한 곳이다. 지금은 주민들이 목숨을 이어 가는 데 필요한 만큼만 일구고 있을 뿐이다. 나아가 이 발견에 높은 땅의 줄기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전혀 합당하지 않다. 우리가 운 나쁘게 낮은 모래섬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고 가정한다면 모를까, 그럴 가능성은 낮다. 이 이스터섬이 높은 땅의 줄기로 묘사된 그 땅이라면, 우리 항로상 반드시 그 섬을 보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이스터섬은 우리가 찾는 땅이 아닌 다른 땅이며 우리 항해의 한 부분은 달성되었다고,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 섬은 우리가 만나기를 바라는 땅이 지닌 특징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의장은 위의 모든 의견을 이 회의에 제출하여 심의를 구하며, 적절한 바에 따라 그 의견을 활용하고자 한다.

1) 공교롭게도 라페루즈의 방문 역시 4월 10일이었다. 64년 뒤의 일이다.

2) 편집된 네덜란드어 일지에서는 괄호가 잘못된 자리, 곧 ‘inasmuch(…이므로)’에 해당하는 omdat 앞에 놓여 있다. 지금 번역한 대로 ‘discovered(발견한)’ 뒤에 와야 함이 분명하다.

3) 이스터섬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1767피트에 이른다. 다른 두 봉우리는 각각 해발 1327피트와 1323피트이다. 쿡은 “언덕들은 15~16리그 거리에서도 보일 만큼 높다”라고 말한다.

이에 이 모든 점을 주의 깊게 살피고 충분히 따져 본 끝에, 다음과 같이 만장일치로 결의한다. 앞서 말한 이스터섬은 적당한 높이에 불과하므로 높은 땅의 줄기라는 묘사에 조금도 들어맞지 않음이 논란의 여지가 없다. 또한 이곳에서 귀금속이 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고 알게 된 바에 따르면, 주민들은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 않고 오직 식물에서 얻은 몇몇 산물만을 옷과 장신구로 쓰며, 따뜻하고 튼튼하도록 이를 서너 겹으로 보기 좋고 깔끔하게 꿰매어 붙일 줄 안다. 나아가 그들은 닭(그러나 닭은 아주 적게 보였다)의 깃털을 엮어 머리에 쓰는 고리 모양 장식을 만들고, 얼굴과 몸의 다른 부분에도 몸 한쪽이 다른 쪽과 대칭이 되도록 규칙적이고 균형 잡힌 무늬를 그리며, 납작한 조개껍데기를 목걸이로 걸고, 귀를 장식하려고 귓불의 틈에 (우리 파스닙처럼 생긴) 어떤 뿌리를 끼운다. 또한 우리가 찾는 땅의 전초이자 확실한 표시여야 할 작고 낮은 모래섬을 우리는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남위 27도 선을 따라 서쪽으로 100마일을 더 항해할 때까지 침로를 유지하고, 그곳에 이르면 상황에 따라 그때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조치를 취하기로 만장일치로 합의하고 선언한다.

위의 배에서 위에 적은 날에 결의함. (서명) 야코프 로헤베인, 얀 코스터르, 코르넬리스 바우만, 룰로프 로젠달.

이 거주용 오두막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며 덧붙일 것은, 우리가 상륙한 곳에서 본 오두막이 예닐곱 채에 불과했다는 점뿐이다. 이로써 모든 인디언이 재산을 공동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분명히 짐작할 수 있다.

끝으로 그들의 배는 조잡하고 허술하게 만들어져 있다. 카누는 작은 판자 여러 장과 가벼운 틀을 짜 맞춘 것으로, 앞서 말한 식물성 산물 Piet로 만든 아주 가는 꼰 끈으로 솜씨 좋게 엮어 묶는다.

이 결의가 가결되고 서명된 뒤, 얀 코스터르 선장은 의논 삼아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지금 동쪽으로 12마일만 짧게 순항해 보면, 앞서 말한 이스터섬이 정말로 우리가 목표로 삼아 침로를 잡은 그 땅인지 아주 쉽고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배들은 서로 2마일 간격을 유지하되, 만약 낮은 모래섬이 보이면 다시 가까이 모이도록 한다. 그렇게 되면 앞서 말한 이스터섬이 우리가 발견하려던 땅이라는 사실이 확인될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모래섬이 보이지 않는다면, 앞서 말한 이스터섬은 (우리 항로 바로 위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 우리 원정이 향하는 땅과는 다른 땅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모래섬이 발견된다면, 우리 항해의 두 번째 과제를 진척시키기 위해 더 일정하고 강한 무역풍을 받을 수 있도록 북쪽으로 침로를 잡아야 한다. 첫 번째 과제는 앞서 말한 모래섬을 만나는 순간 이루어져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검토한 끝에 만장일치로 승인하고 채택하였다.

위의 배에서, 앞의 결의가 있던 날에 이같이 결의하고 결정함. (서명) 야코프 로헤베인, 얀 코스터르, 코르넬리스 바우만, 룰로프 로젠팔.

11일. 이날 바람은 북북서와 북서로, 중간 돛을 펼 만한 바람에 바다가 거칠었다. 주 닻을 내리고, 앞돛대와 주돛대의 활대를 내렸다. 첫 당직 네 번째 모래시계 무렵 틴호번호의 작업용 닻줄이 끊어졌다. 도움이 필요하냐고 소리쳐 묻자, 그들은 ‘아니요’라고 대답하였다.

[로헤베인 항해일지 발췌 끝]

편집자 주: 탐험가들의 바람은 결국 실망으로 끝날 운명이었으며, 일지의 뒷부분에는 이 주제와 관련된 내용이 없다. 이스터섬의 위도선을 따라 정서쪽으로 나아가는 항로에서는 아무 땅도 보이지 않았다. 4월 21일 로헤베인은 다시 장교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번에는 수석 항해사들도 논의에 참여시켰다. 그는 이스터섬이 데이비스, 웨이퍼, 댐피어가 말한 이른바 남방 대륙과 같은 곳임이 틀림없으며, 그들이 지금 찾고 있는 높은 땅의 줄기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결론지었다.

이상이 원정대 사령관 야코프 로헤베인 씨가 쓴 공식 기록이다. 오늘날에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듯한 이 기록은, 진작에 Tweejarige Reize(2년간의 여행)의 허풍스러운 이야기를 전설의 영역으로 밀어냈어야 마땅하다.

B. G. C.

카를 프리드리히 베렌스 특무상사의 보고

카를 프리드리히 베렌스(CARL FRIEDERICH BEHRENS)의 독일어 원문에서 번역: Der wohlversiichte Süd-Länder y das ist: ausführliche Reise-Beschreibung um die Welt.

원본 파일(.pdf): The voyage of Captain Don Felipe González to Easter Island 1770-1 224~230쪽

여기서1 우리는 데이비드의 땅, 곧 남방 대륙의 일부를 향해 서북서로 침로를 잡았다.

1) 곧 후안페르난데스 제도 가운데 더 크고 육지 쪽에 가까운 섬.

2) 배철러스 딜라이트호, 1687년.

3) 라이어널 웨이퍼.

남동 무역풍이 우리에게 아주 유리하게 불어 남태평양 대부분에서 우리와 함께하였으므로, 우리는 날마다 순조롭게 나아갔다.

4) Phaeton aether eus.

우리는 앞서 말한 경도에서 다시 서쪽으로 12°를 더 나아갔는데, 날마다 뭍새와 바닷새가 우리 주위를 맴돌며 함께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4월 6일, 우리가 맞은 첫 부활절1에 섬 하나가 보였고, 우리는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1) 그들은 그 전해인 1721년 8월 1일에 네덜란드를 떠났다.

2) 여기서는 독일 법정 마일을 뜻하는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밤새 육지 가까이 머물다가 아침 무렵 닻을 내리려고 남동쪽으로 해안의 만, 곧 움푹 들어간 곳을 향해 나아갔다.

1) 이 수는 숫자로 적혀 있으나, 활자의 결함으로 o만 인쇄되어 있다. 아마도 50을 뜻할 것이다.

이때 많은 이가 총에 맞았는데, 죽은 이들 가운데 앞서 우리 배에 왔던 그 사람도 있어서 우리는 몹시 슬펐다.

이번에 들어가 본 곳까지는 여러 종류의 새 말고는 아무 동물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원주민들이 우리 배에서 돼지를 보았을 때 잘 아는 듯했으므로, 내륙 더 깊숙한 곳에는 다른 동물이 많이 있을지도 모른다.

원주민들은 점토나 흙으로 만든 단지에 음식을 마련한다. 집집마다 저마다 단지가 있는 듯했다.

집들은 길이가 40~60피트[schuh], 너비가 6~8피트[schuh]에 높이도 그와 비슷했으며, 나무 말뚝 위에 세우고 진흙을 바른 뒤 야자 잎으로 덮었다.

집 안에는 눈에 띄는 가구가 없었고, 다만 붉고 흰 덮개[decken] 몇 장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를 옷으로도 자주 쓰고 덮고 자기도 한다.

이 원주민들은 하나같이 쾌활하고 명랑하며, 체격이 좋고 팔다리가 튼튼하였다. 딱히 날씬하지는 않았지만 발걸음이 날렵하였다. 태도는 다정하고 상냥하였으나 순종적이기도 하였고, 겁도 매우 많았다.

피부색은 갈색으로 대략 스페인 사람 정도의 빛깔이지만, 그들 가운데에는 더 짙은 사람도 있고 아주 흰 사람도 있으며, 햇볕에 꽤 심하게 그을린 듯 불그스름한 사람도 몇몇 있다.

1) Pisang은 바나나를 통틀어 이르는 말레이어이다.

여자들은 대부분 얼굴에 붉은 안료로 줄무늬를 그렸는데, 우리가 다른 어디에서도 보거나 찾아본 적이 없을 만큼 훨씬 선명한 빛깔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아름다운 색을 무엇으로 만드는지는 알지 못한다.

겉보기로 판단하건대 그 사람들에게는 무기가 없었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위급할 때면 해안을 따라 무수히 세워져 있는 그들의 신, 곧 우상에게 의지하였으니, 그 앞에 엎드려 신들을 부르는 것이었다.